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베르토 로셀리니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1906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건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.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접하면서 성장했고, 이후 음향 작업 등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. 그가 데뷔했던 시점은 [[무솔리니]]의 파시스트 당이 이탈리아를 장악했던 무렵이었으며, 이 당시 로셀리니는 활동을 위해 당원증을 발급받았으며, 파시즘 선전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.[* 로셀리니 본인은 이 시기를 흑역사라고 생각했는지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. 그는 훗날 <[[무방비도시]]>에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.] 로셀리니의 본격적인 전성기가 시작된 것은 무솔리니와 그의 파시즘 정권이 몰락한 이후였다. 파시즘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틈틈이 도둑촬영을 하며 제작한 <[[무방비도시]]>[* 이 영화의 각본은 또다른 네오리얼리즘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[[페데리코 펠리니]]의 작품이다.]로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. <무방비도시>는 비전문 배우의 기용[* <무방비도시>에 주연으로 출연한 [[안나 마냐니]]는 훗날 스타 배우로 떠오르고 아카데미상까지 받는다.], 핸드헬드 등 네오리얼리즘의 특징을 대다수 담고 있던 작품으로, [[루키노 비스콘티]]의 <강박관념>과 더불어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로 손꼽힌다. 로셀리니는 이 작품과 함께 그는 세계적인 유명 감독으로 떠올랐다. 이후 <전화의 저편>과 <독일 영년>으로 대표적인 유럽 영화감독으로 떠오른 후, 로셀리니는 국제적인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. 당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배우였던 [[잉그리드 버그만]]이 <전화의 저편>을 보고 매혹되어 로셀리니에게로 달려간 것. 당시 버그만과 로셀리니 모두 이미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. 이후 버그만은 로셀리니와 결혼하고 그의 [[페르소나]]가 된다. 로셀리니는 이 시기 <스트롬볼리>, <유로파 51> 등 네오리얼리즘에선 살짝 멀어졌지만 대신 모던 시네마의 시대를 개막하게 된다. 특히나 <이탈리아 여행>은 [[에릭 로메르]]나 [[장 뤽 고다르]] 같은 [[카예 뒤 시네마]]의 [[누벨바그]] 영화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,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를 언급하라 하면 항상 언급되는 편이다. 1957년 로셀리니는 여러 트러블로 인해 잉그리드 버그만과 이혼한다. 그는 동해 [[자와할랄 네루]]의 초청을 받아 다큐멘터리 <인디아>[*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이지만 [[조너선 로젠봄]] 같은 몇몇 평론가는 로셀리니의 최고작으로 이 작품을 꼽기도 한다.]를 만들고, 1959년엔 <로베레 장군>으로 [[베니스 영화제]]에서 [[황금사자상]]을 받기도 했다. 로셀리니는 말년에 들어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, 텔레비전을 위해 <루이 14세의 권력 쟁취>나 <블레즈 파스칼>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. 이 작품들은 로셀리니의 이전 영화와는 다르게 미니멀하고 실험적인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, 이런 이유로 로셀리니의 국제적 명성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사그라들게 된다.[* 이 때문인지 로셀리니의 후기작은 DVD 등을 찾기가 많이 어려운 편이다. 그나마 [[크라이테리온 콜렉션]]에서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DVD가 나와있다.][* 이 시기의 로셀리니 영화들은 대중이나 시네필들에게도 잘 알려진 편이 아니나 태그 갤러거나 정성일 등과 같은 로셀리니 지지자들에게선 후하게 대접받는 편이다.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같은 경우 [[웨스 앤더슨]]이 좋아하는 영화기도 하다.] 로셀리니는 1977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